분재의 묵계(黙契) 다시 보기
2010. 11. 5. 08:50ㆍ기타/기억하고 싶은글
분재의 묵계(黙契) 다시 보기
글 : 정관영
모든 예술은 그것이 예술인 한, 환영(幻影;illusion)을 만들어낸다. 사실상 물리적으로는 물감의 덧칠 덩어리에 불과한 미술품에서 사물과 흡사한 형상을 보게 되고, 또 사물 자체를 넘어 작자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 사물에 대한 해석된 영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환영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각 예술은 자신의 갈래에 특유한 묵계(黙契;convention)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미술은 평면 공간에 ‘앞과 뒤’라는 거리감을 부여하기 위해 ‘원근법(遠近法)’이라는 묵계를 만들었고, 연극은 배우를 등장인물과 동일시하고 무대장치로 만들어진 오늘의 무대공간을 연극 속의 공간으로 생각하기로 약속하고 있다. 그래서 햄릿을 공연하면 대학로의 어느 연극무대는 중세 덴마크의 크론보리성이 된다.
이 묵계는 허위인가? 허위이다. 그러나 어느 예술도 자신이 바탕한 이 묵계가 가짜라 하여 사기(詐欺)라는 대접을 받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아리스토텔레스 당대에서 ‘시(詩)’란 오늘날의 문학 전반을 가리키는 것이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상(以上)에서 명백한 것은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것을 말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 곧 개연성과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것을 말하는 점에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점은 역사가는 실제로 일어난 것을 말하고 시인은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을 말하는 점에 있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특징인 ‘허구(虛構)’를 예술 일반의 차원에서 말하면 환영(illusion)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모든 예술에 통한다. 환영은 사실(역사)보다 진실하다. 무의미한 것들을 떨어버리고 의미 있는 요소들만을 추려 담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마치 동양의 분재인들을 위해서 한 말인 것처럼 분재예술에도 그대로 부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분재작가의 임무는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나무를 그대로 옮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질 수 있는 가능한 이상적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데 있다. 따라서 어떤 점에서는 분재(수)는 자연(수)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분재는 나무에 대해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진리를 말하고자 하지만 자연의 나무는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형상에 대해서만 말하기 때문이다.”
간략히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과 논법을 빌리면 분재(수)는 자연(수)보다 진실하고 보편적이다. 자연 상태에서 한 나무가 모두 갖기 어려운 장점들(미적 특질들)을 고루 갖추어, 나무가 가질 수 있는 진면목(현실태가 아니라 가능태)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때 진면목이란 '미적' 측면과 '자연(그리고 나무)에 대한 진정한 이해'라는 인지적 측면을 아우른다.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분재를 이해할 때, 우리는 분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분재를 옹호할 가장 중요한 논거 하나를 확보할 수 있다. (예술에 있어 인간의 정신이 작용하는 방식에서도 분재를 옹호할 논변의 중요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모든 예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개연성과 필연성을 바탕으로 현실태를 넘어 가능태를 추구하기 위해 고유의 묵계와 기법을 갖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분재도 이 묵계와 묵계를 실현하기 위한 기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흔히 분재의 배양 과정이나 수련 과정에서 묵계는 가벼이 여기고 기법을 중시하지만, 분재의 묵계는 분재를 존립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자 목표이다. 묵계 없는 기법이란 목표 없는 수단일 뿐이다. 분재사의 전개란 이 묵계의 창조와 변화 및 파괴의 과정이라 할 것이다.(곰솔이 단엽법의 발견에 의해 분재수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단엽법에 의해 묵계가 가능해졌다는 의미인 것이다. 철쭉으로 송백류의 모든 수형을 만든다는 것은 초기에는 옛묵계의 파괴이자 새로운 묵계의 창조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재인은 이 묵계에 대해 늘상 자각적일 필요가 있다.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연성과 필연성은 분재에 있어 분재의 묵계와 기법에 각기 대응한다.
놀랍게도 분재는 그 정의에서부터 분재가 묵계임을 그리고 그 묵계로 추구하는 목표를 명확히 하고 있다.
분재란 초목을 얕고 작은 분에 심어 적절한 배양관리와 정형 정자를 하여 반영구적으로 그 생명을 지속시켜 가며 노수 거목의 이상적인 자연 수형미를 창출하는 것으로 이 분재 작품을 통하여 감동적으로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감상케 하는 자연 조형 예술 작품이다. (자료:경암분재 유창희)
이 정의(대부분의 분재의 정의)는 축소한 초목에서 노수거목의 모습을 보고, 이상적인 자연수형을 본다는 묵계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 노수거목의 모습은 1차 환영(幻影)이요, 이상적인 자연수형이나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이란 궁극적 환영(幻影)이며, 그 환영은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가능한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적절한 정형 정자, 생명 지속 방법은 기법에 해당한다.)
이러한 분재의 묵계는 분재를 관상하는 경우나 배양하는 경우 언제 어디서나 마주치게 된다. 단지 그것이 뼈대에 해당하는 것이냐 세부에 해당하는 것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분을 예로 들어 본다.
분재의 화분은 자연에서 그 나무가 살고 있는 입지조건을 나타낸다. 자연의 넓은 경치 경관을 연출할 때는 얕으면서 타원형 화분을 선택한다. 사각 화분은 긴장감을 나타내며 바위틈에 자생하는 문인목은 얕으면서 둥근(원형)분이 좋다. 사각의 귀가 반듯하게 된 화분은 자연에서 웅장하고 무게가 있고 마을 한 복판에 심어진 정자나무처럼 평지에 있는 반듯한 나무를 표현 할 때 사용한다. 평지에 있는 나무 중 에서도 줄기가 곧으면서 굵은 나무는 사각에 깊은 화분, 줄기가 가늘면서 곧은 나무는 사각이면서 얕은 화분이 좋다. 줄기에 곡이 들어간 모양목은 사각이면서도 귀가 둥근 화분을 사용하고 경사지에 있는 나무인 사간은 타원분을 사용한다. 현애는 좁고 깊은 분을 사용한다.
개연성을 바탕으로 한 묵계가 아닌가!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예술이란 고유의 묵계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기법으로 이상적 미적 가능태를 실현하는 인간 활동이다.
그러므로 분재의 묵계란 분재 예술의 존립 바탕이며 동시에 그 목표와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분재의 묵계를 다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5. 12. 02.
'기타 > 기억하고 싶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경산수 VS 진경분재 (0) | 2011.12.23 |
---|---|
잭슨 폴락(Paul Jackson) 그저 나는 그런 식으로 그림이 완성되기를 허용해 줄 뿐이다 (2) | 2011.10.21 |
형상이 선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선의 움직임이 형상을 생성한다. (2) | 2011.10.17 |
분재입문 New Start with zero (0) | 2010.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