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이 선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선의 움직임이 형상을 생성한다.

2011. 10. 17. 00:22기타/기억하고 싶은글


분재에서 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분재가 도달하려는 모순적? 경지에 대한 귀중한 단서를...

돌에도 피가 돈다. 나는 그것을 토함산 석굴암에서 분명히 보았다. 양공의 솜씨로 다듬어 낸 그 우람한 석상의 위용은 살아 있는 법열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인공이 아니라 숨결과 핏줄이 통하는 신라의 이상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 신라인의 꿈 속에 살아 있던 밝고 고요하고 위엄 있고 너그러운 모습에 숨결과 핏줄이 통하게 한 것은, 이 불상을 조성한 희대의 예술가의 드높은 호흡과 경주된 심혈이었다.

그의 마음 위에 빛이 되어 떠오른 
이상인의 모습을 모델로 삼아 거대한 화강석괴를 붙안고 밤낮을 헤아림 없이

쪼아 내고 깎아 낸 끝에 탄생된 이 불상은 벌써 인도인의 사상도 모습도 아닌 신라의 꿈과 솜씨였다.

  석굴암의 중앙에 진좌한 석가상은 내가 발견한 두 번째의 돌이다. 선사의 돌에서 나는 동양적 예지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지혜의 돌이었다. 그러나, 
석굴암의 돌은 나에게 한국적 정감의 계시를 주었다. 그것은 예술의 돌이었다. 선사의 돌은 자연 그대로의 돌이었으나, 석굴암의 돌은 인공이 자연을 정련하여 깎고 다듬어서 오히려 자연을 연장 확대한 돌이었다. 나는 거기서 예술미와 자연미의 혼융의 극치를 보았고, 인공으로 정련된 자연, 자연에 환원된 인공이 아니면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예술은 기술을 기초로 한다. 
바탕에 있어서는 예술이나 기술이 다 art다. 그러나 기술이 예술로 승화하려면 자연을 얻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공을 디디고서 인공을 뛰어넘어야 한다. 몸에 밴 기술을 망각하고 일거수 일투족이 무비법이 될 때 예도가 성립되고, 조화와 신공이 체득된다는 말이다. 나는 석굴암에서 그것을 보았던 것이다. 돌에도 피가 돈다는 것을 말이다.


 
  - 조지훈<돌에 미학> 中 -




[조맹부 수석소림도]




'수석소림도'는 붓의 흔적을 지우는 선염이나 색채도 없이 붓의 골기(骨氣)가 그대로 드러난 선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이다. 서양의 그림이 면 또는 양감을 사용하여 사물의 형태를 구성하는 반면, 동아시아의 회화는 철저히 선이 만들어내는 조형이다. 면이 정지하려고 한다면 선은 운동하려고 한다. 이는 세계를 불변하는 요소들의 구성으로 보는 유럽인의 시각과 세계를 변화 생성하는 기(氣)의 흐름으로 보는 동아시아인의 시각을 각각 반영한다.

.. 중략...


'수석소림도'에서 우리는 형상과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서사)를 찾을 것이 아니라 화가 내면의 정신과 자연의 기운이 붓을 따라 흐르면서 만드는 호흡을 감지해야 한다. 형상이 선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선의 움직임이 형상을 생성한다. "바위가 천지의 뼈"(곽희)라고 한다면 천지의 정신과 기운을 나타내고 서예의 골기를 표현하는 데 바위보다 더 적절한 것이 어디 있으랴. 비백의 굵은 선은 바위이면서 서예의 획이며, 동시에 천지의 기운이다.

- 이성희 시인의 산수화 산책 <11> 조맹부의 수석소림도(秀石疏林圖)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