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재 잡설] 분재의 자연스러움에 대하여... (ver 1.0)

2012. 9. 29. 08:58분재이야기/분재 잡설

[분재 잡설] 분재의 자연스러움에 대하여... (ver 1.0)



분재는 분위에 있습니다.

분재는 자연에 있지 않습니다. 


너무도 당연해 

아무런 뜻도 담지 않은 듯한 이 사실이

분재인들이 분위에서 만나고자 하는 자연스러움에는 

어려운 숙제를 남깁니다.


분재는 사람이 나무를 분위에 심고 가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움 이라면?

자연의 나무를 가져와 분위에서 사람의 손길로 

즉 인공으로써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자연에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자연이였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 이유로 

나무가 분위에 있다면 이미 그로써 인위이며 인공일 것입니다.

이러한 분재와 자연스러움의 태생적 모순으로 인해 분위에서의 자연스러움이란 

자연의 있을 법한 모습 또는 내가 자연에서 보았던 나무의 모습을 분위에 옮겨 놓는, 

분위에서 흉내(재현?)해내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습니다. 

분위에 있다는 사실, 실은 인공의 손길로 만들어 졌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을 덮을 만한 그 무언가가 없이는 

분재는 영원히 자연의 모사품 이란 오명에서 자유로 울 수 없어 보입니다.


자연의 나무가 아닌 분위의 나무가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서(온전히 그 아름다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제 분위로 옮겨진 나무는 자신의 모습만으로 자신이 살아온 환경을 그려내며 

감상하는 이를 납득시키고 스스로를 설명해야 합니다.


내가 자연에서 본 나무를 각고의 노력으로 분위에서 표현해 보면

늘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실력 때문이겠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르고 좀 더 능숙해 진다 하여도 

결국은 그저 자연의 위대함앞에선 인간의 초라함을 깨닫는 것으로 끝날 일인 것이 자명해 보였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내가 표현하려는 것이 닮고 싶은 나무 한 그루(혹은 이미지)

단지  그 나무의 겉모습인 것이 문제였습니다.

내 마음을 빼앗긴 것은 나무를 통해 나타난 자연인데 

내가 쫓은 것은 그저 자연의 한 가지 현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분재작가의 임무는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나무를 그대로 옮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질 수 있는 가능한 이상적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데 있다. 따라서 어떤 점에서는 분재(수)는 자연(수)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분재는 나무에 대해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진리를 말하고자 하지만 자연의 나무는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형상에 대해서만 말하기 때문이다.” 

< 정관영님의 "분재의 묵계(黙契) 다시 보기" 中 > 


"나무의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진리"란  "나무의 본성" 이라 생각합니다.


나무의 모습, 현상을 바로 살피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입니다.

더우기 많은 나무의 다양한 모습속 (변하지 않는)공통점을 통해 

현상이 아닌 나무(수종)의 속성을 발견하고 적용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작업 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부족합니다.

나무의 속성 또한 본성이 드러난 한 가지 현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럽게 나무의 속성을 발견하고 각고의 노력으로 적용해 본다 하더라도 나무의 본성에 닿지 못 하고서는 

(그 나무의 성질 즉 속성을 알지 못하고 개개의 현상만으론 되지 않는 것 처럼)

속성이 아닌 본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진짜 나무를 표현해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 입니다.

(속성 조차 버거운데 아니 현상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본성에 다가갈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분재가 우리의 눈을 통해 전달되고 감상되어 지는 시각예술이라 하여도

겉모습(현상)을 쫓는 것과 본성을 쫓는 것은 분명한 차이를 만들 것입니다.






 
분위에서의 자연스러움이란?

나무를 잘라 줄여 화분에 심고

잘 아물리고 비어 있는 곳에 가지를 달아 
그저 공간을 꽉채웠다 비웠다 하며 길러내는 노력과 세월만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님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한 나무의 몇몇곳에 내가 자연이라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담고 

나무의 생리를 몸에 익혀 감탄 할 만한한 노력으로 길러낸다 한들
사람의 욕심에 뽑혀와 여기 저기 잘리우고 사람의 원하는대로 꾸며진 
인공의 자연, 인공의 나무임이 뻔히 들어 난다면 혹은 슬쩍 잘 감추어 져있다 하여도 
분속에 담겨있는 나무에게 자연스러움을 온전히 입혀 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러운 분재란 사람의 손길로 만들었으되 
사람이, 인위가 느껴지지 않아야 하는 모순된 숙제를 풀어야 합니다.

사람이 만들었으되 사람이 아닌 자연이 만든듯 느껴지는 나무. 

그러한 나무란 배양자의 손길이 자연의 섭리와 일치하는 경지?에 다다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나무의 모습에서 사람의 손길을 덮을 만한 환영(illusion)을 보여줄 수 있는 나무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성인(聖人)은 만물이 스스로 본성에 순응하려 함을 도와줄 뿐, 의도적으로 행하지 않는다.” 

무위자연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닿을 수도 없는 이상을 쫓는 것일까? 


아니다 생각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한 걸음 양보해서 분위에 있는 나무가 

자연에 있는 나무만큼 자연스럽게 되었다 하여도

자연속에 있을 또는 있었을 나무를, 

자연을 자연스럽게 만들기위한 (또는 나무로써 나무를 만드는)수고가 

무엇을 위한것 인지 답해야 합니다.

(그저 내 곁에 두기위해 작게 만들기에 심취해 

수목의 자람이란 어쩌면 존재 자체인 생리를 억제하고 

작게 더작게 더 빽빽히 만들거나 생명이 있는 나무를 

장식장에 들어갈 싸이즈에 딱맞는 미니어처를 만드는 것이 분재일까?

그 어리석은 고단함이 분재의 치열함이며 가치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분재는 자연의 나무로는 표현 되지 않을, 표현할 수 없는 

자연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여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 것입니다.


분재의 자연스러움은 

자연속에 같거나 비슷한 나무가 있음으로 

또는 있을법함으로는 충족되지 않을 뿐 아니라  분재가 추구해야 할 자연스러움은 (자연의 그것이 아니라 ) 이 나무가 분이란 작은 공간에서 살고 있음이 이곳에서 자라왔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러하라란 

(자연이 아닌)분위에 모습의 설득력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 설득력 위에 겉모습이 아닌 나무의 본성을 담아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분재는 

그것이 인공의 자연이란 태생적 모순위에 분재의 자연스러움이란 새로운 가치를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인공의 자연 그 분명한 모순속 설득력이 만들어내는 환영앞에서 

이 작은 분이란 공간이 커다란 대지가 되기도 하고 

때론 깍아지른 절벽위에 선 듯 아찔함이 느껴지는 짜릿한 감동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분재의 자연스러움...?

어쩌면 인간스스로가 대자연이 되어야 하는 무모함과 오만함은 아닐런지...

하지만 그것이 오만한 무모함이라 하여도 분명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달콤한 유혹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




[요약]  

분재의 자연스러움이란 자연의 그림자를 쫓는 것으로는 닿을 수 없다.

(분에서 즉 자연이 아닌 인공에서 드러낸)

분재의 설득력위에 나무의 본성을 담아 낼수 있을때, 

인공의 자연이란 태생적 모순위에 분재의 자연스러움(인공의 자연스러움)이란 

(자연의 그것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인간에게 선물할 것이다.






Ps.

심천님과 무소유님께서 귀한 댓글을 주셔서... 이곳에 옮겨 둡니다.


이따금의 대화여서 반가운가, 반가우니 대화를 하는건가.

청년 분재인다운 진지한 주제. 진지한 접근태도와 실천의지-청년 202의 화두.

노력하는 사람은 세월의 경과와 더불어 나름의 답을 찾고 그 면모를 보여주더만.

특히 예술은 감각을 통해서도.............        


총론의 윤곽이 섰으니 그 총론이         각론을 통해 조금씩 그 면목이 드러나게 되리라 기대하네

경험해 보니 총론과 각론은 서로 오가야 하는 상호보완적인 것이더만.


열심히 하고 주관이 뚜렷이 섰더라도

다른 사람에게서도 배우는 자세는 사회뿐만 아니라 분재에서도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드네

언급한 <나무의본성> 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는 것은 내 생에 다 못할 일일 수도 있고

나 혼자서는 못할 일일 수도 있고......

과업이 클수록 동행도 필요하고.....


햇수로는 8년차인데 배양 외의 분재관련 부분을 살피느라 배양능력은 2년차라.

나무를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바가 아주 이따금은 있네.


그런데 202님은

든든한 배양능력에 깊은 생각까지 가졌으니 좋은 성과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지

후생가외라(실제는 동기생가외라)

자주 만나서 진하게 배웠으면 좋겠네!


시간 나는 대로 와서 배울 터이니

배양         개론, 각론, 팁 할 것 없이 잘 가르쳐 주시게.




아니 근데 여기는 같은 다음인데 댓글의 분량에 제한이 없지?????


따뜻한 격려 감사 드립니다.

부끄러운 글이지만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기위해 용기를 내어 보았습니다.


<나무의 본성> 이란 (너무 거창한)단어에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달리 표현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머든 익숙해 지는 법인지 차츰 입에 붙기도 하고 ^^;


현재 제가 생각하는 나무의 본성이란 <자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무가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자람>일 것이며 

나무의 모습에 감동하는 것도 긴 세월을 이겨낸 <자람>이라 생각합니다.


분재를 자연의 모방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나무의 현상인 겉모습(이미지)이 아니라

나무의 본성을 드러낼수 있는 모방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러한 관점이 즉각적이지 못하다 하여도

결국은 큰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겉모습을 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을 분재가 추구해야 할 유일한 가치라 본다면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분재는 완성되며 완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나무의 생명이 다하기전에 나무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시들어 가는 꽃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더욱 귀히 볼 수도 안타까우 할 수도 있겠지만...)

완성목 이라하여 "멈춤의 분재"를 추구하며 고도의 기술로 나무의 생장을 늦추려 할 것이 아니라

나무의자람을 염두해둔 관점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무의 모습을 흩어지지 않을 고도로 계산된 수형을 추구하거나

분재란 완성과 풀어해침 또 다른 완성이란 긴 관점을 처음부터                                 

염두해둔 배양과 감상등 새롭고 다양한 변화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나무의 본성중 하나가 <자람> 이라 해도 되는 것인지 자신은 없지만

본성을 쫓으며 모방하는 것과 

현상이나 속성 또는 내맘속 자유?를 쫓아 만드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그져 배양자의 기호가 아닌 

<나무의 본성>을 쫓으며 들어난 작가의 작품과 그가 만들어낸 작풍을

감상하는 것이 분재의 기쁨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표현의 대상과 동일한 매체를 사용하는 분재의 어리석음을

무엇으로 매꾸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합니다.) 


나무를 앞에 두고 

저의 고민을 들어주실 날을 손 꼽아 기다려 봅니다. ^^


Ps. 

1. 저는 해마다 새로운 출발~ !!
저의 배양 능력은 해마다 1년차 입니다.T. T 

2. 헙! 정말 댓글 길게 써지는 군요. 저도 지금... ^^;

나무를 배양하는 햇수가 더해지면서

'나무의 자연스러움', '나무의 아름다움'에 대한 고민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분우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오르내리지만

그 기준이 개개인 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의견의 일치가 되기 어려운 주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 또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지만 딱히 무어라 표현하기 어렵다는 말 밖에..


'분재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고민은 앞으로도 분재인들이 풀어야 할 숙제 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202님과 같이 깊이있는 생각을 하고 있는 많은 분우들과 함께 고민하는 과정속에서

분재가 예술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_ _)


미루고만 싶은 고민이였지만

고민을 나눌 수 있기에 희망이 없지는 않을 듯 합니다.


"분재가 예술로써 많은 사람들이게 사랑 받는다"

정말 가슴 뛰는 상상입니다. 

그리고 함께 꿈꾸는 분우들이 있다는 것은 더욱 가슴뛰는..^^
<자람>과 련련하여

자람을 분재의 본성과 관련하여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고려청자의 관찰을 통해서 고려인들이 선호한 규격 치수는 16cm임을 확인한 바 있었는데

일본 분재의 14cm 로 꽉 짜인 분재를 볼 때마다 개인적으로는

야박스러움, 독함 - 기술스러움을 느끼곤 해서

일반적으로 최소한의 여유를 허락하는 규격은 16cm가 아닌가 생각중이네

그리고 이것이 규격상의또 그 규격이 허용하는 여유가 한국적 분재의 특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네

(2cm가 그렇게 큰 차이로 느껴지는 것은 14cm와 16 cm 사이인 것도 알게 되었네)


아직 초보적 생각에 그치고 있지만


식물의 생장을 허용하는 배양

단계마다의 아름다움을 실현하면서도

3~5년이면 한 치수 위의 분으로 이주할 수 있게 해주는 배양

을 생갹해 보고 있네


14cm 혹은 그 이하로 조여넣는 미의식도 개성으오 인정받아아 하겠지만

위의 생각과 같은 배양 방식으로도

작은 분에 조여넣는 방식과 대등한 수준의 혹은 그 이상의 아름다움과 개성을 확립하는 것

그것이 과제가 될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가야할 것인지

그것이 한국 분재가 취할 수 있는 한 방식이 될 수 있는지.



그냥 종자 단계의 생각인데

혹 자람과 관련하여........
댓글이다 보니..^^; 첨언..

<나무의 본성>이 오직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표현해야 할 것도 오직 본성이라고 생각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본성을 거스르는 표현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잘못은 아니다 하여도

자연스러움과는 거리를 만들수 밖에 없다(나무로써 나무를 표현하기에...) 생각 합니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면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나무를 아니 분재의 설득력일 것이라 생각 했습니다.


<자람>은 말씀해 주신것 처럼 허용할 수도 있고 

이를 지금보다 좀 더 잘 이용할 수도 

<자람>이 만들어내는 변화를 즐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고정된 한가지의 이미지를 쫓아 긴 세월을 통해 완성한다 하여도..

이후 허물어짐과 또 다른 완성을 이루는 것도 어찌보면 <자람>이 만들어낸

변화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移行)으로서의 발전하는 것 처럼) 

자람이 쌓여 변화를 만들고 그 변화가 수형까지 변화 시키는... 

<자람>이란 본성을 온전히 인식하고 있다면 분재를 즐기는 방식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자람>을 지금 보다 좀 더 능숙하게 다룰수 있게 된다면

자람을 허용 하면서도 나무의 규격을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상상해 봅니다.


<자람>의 허용의 예를 들어 주셨으니 유지의 예를 들어보면

나무가 가지를 만들어 낼 때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 가지고 있는 양분을 사용 할 것입니다.

이러한 소비와 만들어진 가지의 생산이 등가를 이루는 시점에 그 가지를 덜어 낼 수 있다면

나무는 그대로 유지될 수도 않지 않을까 머 이런..^^;

(수피가 앉은 장수매의 줄기에 도장지를 받지 않으면 수형이 되지 않을때

결국엔 수피를 포기하고 가지를 만들 수 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도장지가 줄기에 영향을 주기전 시점을 놓지지 않고 작업을 하면 수피를 유지하면서도

가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장수매의 경우 수피를 잃고 가지를 얻는것이 과연 이익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조여넣기와 단계적으로 키우는 것 중 후자가 더욱 어렵다 생각합니다.

필요없는 것을 덜어내는 것과 필요한 것을 딱 알맞게 만들어 내는 것의 차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입니다.


배양을 통해 한 치수를 위로 올린다는 것은 (키만 키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은 다른 이미지가 될 것이고

(가지와 줄기의 굵어짐의 비율이 유지되지 않으며 줄기와 그루솟음의 비율은 말할것도 없기에...)

조금 더 큰 나무를 만든다면 처음부터 그 크기로 가는 것이 쉬운 길일 것입니다.


치수를 올리면서도 나무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은 

배양이 아니라 수형적으로 접근해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가득채운 모양목에서 한 부분이 비워지면 수형이 망가진 것이지만

문인목에서 하나 부분이 비워지는 것은 또 다른 맛이 될수도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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