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재 잡설] 분재적 행위 ver1.1

2010. 10. 31. 22:12분재이야기/분재 잡설



털어내도 털어내도 어느새 다시 내 신발속에 

들어와 날 불편하게 때론 아프게 하는 돌맹이 처럼 나를 불편하게하던 물음

나는 왜 (하필?)분재를 하는가?
이 물음은 분재란 무엇인가? 란 물음과 단단히 묶여 있었는데 이 물음이 이렇듯 긴 시간 동안 괴롭힐 것임을 처음엔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분재를 하면서 분재가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하고, 내가 왜 분재를 하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분재에대한 정의와 설명을 접할때 마다 나를 더욱 혼란 속에 길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분재가 글자 그대로 단지 분 위에 심어진 나무라면
분갈이를 위해 잠시 분을 벗어난 분목이 화분 위에 담겨 있지 않다 하여 분재가 아니며,
강한 성장세력을 얻기 위해 밭에서 가꾸고 있는 나무는? ^^;

분재가 자연수 중에서도 노수거목을 분위에서 표현한 것이라면
어린 분목들은 정확히 언제부터가  분재가 되는 것이며, 노수 거목의 모습을  가지지 못한(않은)
분목들은 아무리 감동을 주는 멋진 분목이라 하여도 분재가 아니다 보아야 하는 것일까? 
^^;

분재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위한 것이라면 단지 그것을 위한 수고라면
수년 아니 평생을 배양에 바치기 보다  지금 당장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을까? 자연의 신비와 비경을 다룬 놀라운 다큐멘타리를 보다가도 쉽사리 체널을 바꾸는 내가 왜 분재에 목을 매는가? 
^^;

분재가 그림이나 음악처럼 처럼 작가의 사고를 드러내는 매체라면
좀 더 온전히 작가의 의도에 지배되어지는 다른 매체를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분재가 예도이며 양생의 도 일수 있다 하여도 그것은 분재의 정의라기 보단 가능한 분재의 유익 또는 바람직한 마음 가짐에 대한 귀한 가름침일 뿐인 것은 아닐런지...

이 소소한 물음들이 분재정의들의 치명적 결함을 들어내는 것은 물론 아니다.
수많은 분재에 대한 설명들 모두가 틀린 말이 아니였다.
하지만... 틀리지 않았다고 정답일 수는 없지 않을까?






[분재 잡설]  분재적 행위 ver1.1


분재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물음속 분목의 특질만을 들여다보다 놓치기 쉬운 것이 있는데,
실은 그것이 시작점 이였음에도 너무나 당연하여  잊고 있던것 또는 언급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분재란 가꾸는 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가꾸는이의 행위 행위를 배제하고는 존재 할 수도 지속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분재를 정의함에 있어서는 분재를 만들어낸 그 행위,
즉 분재적 행위를 담지 못한 그 결과물인 분재의 객관적 특질에 대한 서술만으로 이루어진  정의는
언제나 불완전 할 수 밖에 없다.
(이때 행위란 생산(변형)에만 관계된 행위만이 아니라 분재적 사유와 분재적시각  그리고 바라보며 감상하는 행위까지 포함 한다.)

모든 예술은 인간의 출현 위에서 이루어 진다.
그리고 분재 역시 인간의 출연 위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분재적 행위는 인위스러움의 부재( 분재적행위의 부재 즉, 자연스러움)를 향하고 있다.
분재는 이미 자연인 것을 가져와 인공적 변형을 통해 다시 자연을 만들고픈 어찌 보면 모순적 행위이며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분재가 어쩌면 영원히 끝날지 않을 시지프스의 형벌이 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한 걸음 다가가 화분 위의 소나무를 생각해 보자
사람의 손길이 닿기 전 부터 또는 닿지 않았다 하여도 이미 소나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떠한 반론이 있을지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소나무 분재를 만든다는 것은 매체와 지시대상의 물리적 변화만으로 본다면
그져 소나무를 가지고 소나무로 만든는 것 소나무로써 소나무를 표현하는 것이다. 매체와 지시대상의 동일성
바로 여기에 다른 매체와는 달리 분재의 정의가 그 결과(변형)물이 아니라 그 행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한걸음 물러나  전통적 분재를 살펴 보면
분재는,  분목의 실재성위에 작가의 행위로써 변형의 자국을 만들지만
그 행위는 (의도된 결과는 자국으로 남긴체)
원죄를 속죄하려는 듯
행위로써 그 행위의 자국을 지우려 한다. 게다가 분재는 회화나 조각 음악처럼 온전히 작가의 사고와 작가의 손길만으로 만들어진(또는 변형된) 창작물이 아니다. 분재는 나무의 생장이란 자연의 변화 위에 분재적 행위로써 작가(배양자)의 의도된 변형을 더한것이며 , 따라서 분재는 작가가의 의도, 오직 그대로 만들어 지지 않는다.  (언제나 더 좋거나 더 나쁘게 만들어 진다.)

이 아이러니한 행위, 분재적 행위는 무었인가?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아이러니와  지시대상의(나무의) 실제성 위에서분재는
다른 매체에서 만큼 온전히 지배되지도 지속되지도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자국  
행위의 자국은 아주 잘 감추어지거나 또는 정당하게  들어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재의 실재성은 다른 매체와는 달리 (분재가 만들어 내는)이미지에 객관성과 신빙성의 힘을 부여함으로 재현된 시공간 속의 대상에 대한 존재를 믿게 만드는 더욱 강한 흡입력을 만들어 낸다.
바로 이것이 분재가 예술이 되기위해 풀어야 할 숙제임과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분재의 마력 이다.

분재적 행위에대한 주목은
밥을 먹을 때 농부의 수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처럼
분재를 감상하며 배양자 의 수고를 함께 읽어내어야 함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나무의 자연적 변화에 작가의 손길을 더 한 분재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결과물인 분재작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재을 만들어온 그 행위에 있음을 이야기 하고플 뿐이다

분재란 단순히 화분위에 심어진 나무를 가리키는 단어 여서는 안된다.
분재란 단순히 화분위에 심어진 나무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분재란 분재적행위의 결과(변형) 이다.
분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분목의 특질을 살피는 것에서가 아니라
분재를 만드는 행위, 분재적 행위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렇다면 분재적행위란 무엇이며 무었이어야 하는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단어라 하더라도 아직은 수형이외의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여기에서의 수형은 모양목, 직간, 현애등 분목의 정형화된 특징을 일컬는 단어들의  총칭으로 써의 수형이 아니다.)

분재적 행위란 수형 생성의 행위 이며
수형의 (가능한 최대의)정의는 분목의 자연적 변화에 더해진 인간의한 변형이다.
(단 이때에 작용한 분재적 경험과 영감 목적 그리고 분목을 감상하는 정신적 행위까지 나무에 대한 사유의 표출이어야 한다) 분재적 행위란 배양자의 수형적 사고를 나무에 담아내는 수형 생성의 작업이다.
그럼으로 아무리 고가의 분목에 아무리 정교한  분재 기술을 구사하더라도 분재적 사유를 담은 수형적 목적의 자각 없는 맹목적 행위의 결과라면 (감상자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하여도)  분재가 아니며, 비록 일반적인 분목과 다르다 하여도 심지어 한번도 분위에 심겨진 적이 없다 하여도 작가의 수형적 분재적 사고가 담긴 행위의 결과물 또는 분재적 사고로 들여다보고 있는 그 순간 그것은 온전히 분재가 되는 것이다.
 

분재가 머야?
... 수형입니다.
그럼 수형은 모야?
... ... ... 분재 입니다. 

  

처음에 시작하였던  분재의 정의에 대한 물음이
이제 단지 수형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바뀐것일까?
아니다 수형은 (분재가 정의를 필요로 하는 것과는 달리) 창작자에 고정되지도 한정되지도 않은 자유로운 (분재적)사고와 그 표출이며 이어야 한다.


수형불형(樹形不形)
수형은 이제 단지 나무의 형상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수형은 규정되고 확정되어 고정된 형태가 있는 창작의 족쇄가 아니다.
수형은 언제나 창작자의 몫으로 온전히 남겨두어야 한다. 
수형의 자유로움야 말로 분재를 예술로써 승화 시킬수 있는 유일한 출구 이기 때문이다.


요약 하면...? 

분재는

살아있는 나무를 표현하기 위해 살아있는 나무를 사용한다.


매체와 지시대상의 동일성

이러한 분재의 실재성은 

분재의 정의를 분재라는 결과물의 특징을 열거함으로써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를 수포로 만든다.


분재의 정의는 그럼 무엇을 통해야 하는가?


분재는 가꾸는이의 행위, 즉 분재적 행위를 배제하고는 존재 할 수도 지속 될 수도 없다.

분재의 처음과 끝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은 분재적 행위이며 

분재적 행위란 수형 생성의 행위이다.


분재란 ?

나무의 자연적 변화에 더해진 인간의 변형의 결과다.

이때의 변화, 변형의 의도, 변화의 목적이 바로 수형이며

이러한 수형 생성의 행위가 분재적 행위이다.

분재란 분재적행위의 대상이며 결과다.


그리고 이 느슨한 정의와 더불어

수형불형(樹形不形)... 수형이 (것모습만을 정의 하는)형이 아닐 때 

수형은 창작자에 고정되지도 한정되지도 않은 자유로운 (분재적)사고와 그 표출이 되어

분재의 실재성이라는 양날의 칼로 

분재적 행위의 부재(不在)를 갈구 하던 분재적 행위는 고전적 굴레를 잘라 내고 

분재를 온전히 예술의 영역으로 옮겨 줄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가을 202씀